양완석 (서울대 건축학 겸임 연구원, 서울대 건축학박사, 레카토 미래 교육봉사단 학술 이사)
양완석 (서울대 건축학 겸임 연구원, 서울대 건축학박사, 레카토 미래 교육봉사단 학술 이사)

# 변질한 수능

그런데 1994년 첫 수능 이후 거의 30년 가까이 지난 현재에서 수능은 기표(記標)만이 남아 있는 듯하여 안타깝다.

수능의 기의(記意)가 학력고사와 다를 바가 없는 시대의 역행이 일어난 것이다. 다시 학원이 활개를 치고, 부모들은 자녀들의 사교육비에 시름하고 있다.

수능 시험 문제의 난이도는 학력고사뿐 아니라 초기 수능과도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어려워졌다.

누적 기출문제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더불어 학생들의 시험으로는 측정 불가능한 역량을 평가하겠다고 만들어진 평가방식인 학생부 전형이라는 것까지 존재한다.

학생들은 역사상 가장 큰 학습 부담을 안고 살아간다. 이 부담감은 학습과 입시에 대한 공포로 이어진다.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마주했을 때 종교와 주술에 의지한다. 그렇게 학생과 학부모들은 학원을 찾는다.

사교육은 공포에 질린 학생, 학부모와 공모하여 학력고사 시절 공부법의 망령을 소환하여 숭배한다. 그런데 비극은 학력고사 시절의 방법이 현재의 어려운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해법 아니라는 점이다.

어마어마한 몸값의 강사들이 포진한 온라인 학습회사에서 ‘대학 합격하면 수강료 전액 환불’이라는 이벤트를 몇 년째 내걸고 있다. 만약 그 업체의 강의를 듣는 많은 학생이 대학에 합격한다면 업체는 진작 망했을 것이다.

이 자체가 이미 업체의 강의가 성적 향상에 크게 기여하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당연히 더 어려워진 문제를 풀어내는 능력은 기출문제의 숙지가 아니라, 학생 개개인의 역량이며, 그 역량에 의해 성적은 결정될 수밖에 없다.

여전히 사교육은 실제 학생들의 성적 향상에 기여하지 못한다.

# 그래서 요즘 애들은

문제는 이들이 성적을 올려주는 소위 ‘돈값’을 못하는 데 있지 않다.

이들의 교과 학습에 대한 자세가 더 큰 재앙의 시작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들은 학력고사 시절에나 통용되는 많은 문제 풀이와 문제 풀이에 필요한 패턴의 연습을 강요한다.

대부분의 학생은 학원에 다니게 되므로 결국 학습에 대한 관념은 학업성취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동일해진다.

입시가 고교 시절까지 학습의 목표인 기형적 현실에서 학생들에게 학습이란 높은 성적을 받는 것이고 곧 문제 풀이의 숙련도를 어떻게든 끌어 올리는 것이다.

높은 지적 능력의 자원들이 그 역량을 학문적 이해에 쏟는 것이 아닌 문제의 패턴을 파악하는 데 쓰고 있다는 비극이, 문제나 개념의 이해도는 떨어지나 풀기는 푸는, 소위 머리는 좋은데 생각이 없는 학생의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안 그래도 어마어마한 문제량의 압박에 사유의 기회를 박탈당한 학생들에게 사교육의 전횡까지 더해지면서 학습은 전혀 즐겁지 않고 즐겁지 않은 공부는 단순 노동이 된다.

수능 제도 시행 초기에 학생들이 깨달았던 학습의 본질도, 그 본질을 통해 얻었던 자아존중감도 얻을 수 없다.

작금의 학생들은 쌓아놓은 부품들을 조립해야 하는 80년대의 공장 직공처럼, 성적을 조립해야 하는 것이다. 하루에 수만 개의 기판을 단순 조립하는 직공이 기판 하나하나에 의미 부여를 한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이다.

개념하나, 문제 풀이 과정 하나를 천천히 반추하고 의미를 내재화 시키는 과정이 비효율이 되는 슬픈 시대, 학력고사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이다.

# 이상과 현실

고백하면 필자는 교수평가에서 박한 점수를 받는 편이다.

처음 몇 해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분명 후학들과 관계도 좋은 편인 것 같은데, 나름 충실히 준비하고 수업에 임했는데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해 인가 친하게 지내던 한 친구에게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중간·기말고사 문제가 매 학기 바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취업을 위해 높은 학점을 받는 것이 지상과제인 후학들에게 내 수업은 너무 껄끄러운 것이었다.

전공 서적에서 다루는 내용 이외에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는 설명은 어렵고 지루한 것이고 시험은 준비하기에 용이하지 않으니 고작 3학점을 받기 위해 이들이 투자해야 하는 시간은 너무 많다.

학문을 함께 연구하는 예비 동료로서 후학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은 나와 내 동료들의 본심은 그들이 속한 현실, 그들이 살아온 입시지옥과는 괴리된 순진한 이상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후학들에 대한 성토대회가 열리는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는 나와 동료들 같은 ‘꼰대’ 교수에 괴로워하는 후학들의 성토대회가 열리고 있지 않았을까. 답답한 가슴이 어느덧 먹먹한 마음으로 바뀌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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