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완석 (서울대 건축학 겸임 연구원, 서울대 건축학박사, 레카토 미래 교육봉사단 학술 이사)
양완석 (서울대 건축학 겸임 연구원, 서울대 건축학박사, 레카토 미래 교육봉사단 학술 이사)

# 요즘 애들은 정말 왜 그러는 것일까

얼마 전 오랜만에 코로나19로 못 만나던 선후배들과 모임이 있었다. 가벼운 안부로 시작한 자리는 어느새 ‘요즈음 후학들’에 대한 성토대회로 바뀌었다. 각자 근무하는 대학은 달랐지만 비슷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물론 그리스 고전 ‘일리야드’부터 ‘요즘 애들은 나약하다.’는 말이 나왔고, 기원전 233년 쓰인 중국의 ‘한비자’에도 ‘스승이 가르쳐도 변할 줄 모른다.’는 글이 발견된다. 우리도 소위 ‘꼰대’가 되어가는 것이 문제라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요즘 후학(後學)들은 생각이 없는가.’ ‘도대체 대학, 대학원은 어떻게 들어왔는가.’라는 격한 성토는 학계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과 함께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예전보다 건축학전공에 지원하는 자원들의 학력이 떨어진 것이 이유라는 말도 나왔지만, 이는 단지 건축학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증언들도 나왔다.

혹자에게 이것이 우리들의 권위 의식으로비칠 수도 있겠지만 학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선배들이 그러했듯, 후학 양성에 대한 나름의 소명 의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 후학들에게 학문이 학문 자체로서가 아닌 수단으로서만 기능하는 듯하여, 학문연구에 대한 기본기조차 잡혀있지 않은 듯하여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얼마 전 모임은 그 답답함을 토로하는 자리였다.

후학들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 성실의 시대, 학력고사

잠시 시계를 돌려 학력고사(學力考査)가 최초 도입된 1981년을 상기해 보자. 당시 우리나라는 강력한 노동 경쟁력을 지닌 제조업 중심 국가였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이며 지하자원이 부족한 나라, 그러므로 이 나라의 경쟁력은 국민의 성실함 라는 식의 프로파간다를 전 국민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지정학적 특성이 반영된 미국의 지원이나 세계 경제 성장 등의 외부 호재도 주요한 원인이었지만 한국 전쟁 이후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압축 고도성장을 할 수 있는 동력은 우리 부모 세대 특유의 성실함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시대정신이 반영된 것이 학력고사였다.

비상식적인 업무시간 동안 빠르고 정확한 일 처리를 해야 했던 노동의 현실은 그대로 사회의 문화, 교육의 전제가 되었다. 숨 쉬듯 일하는, 기계 같은 노동자를 양산해야 하는 교육, 그 교육에서 원리의 이해나 의미의 반추는 불필요함을 넘어 일종의 오류이었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학력고사 시대의 막바지에 극심했던 소위 ‘족집게 과외’의 성행은 학력고사가 어떤 시험이었는지를 가늠케 해준다. 내용을 통째로 암기하거나 풀이 구조를 암기하면 되는 문제들이 워낙 대다수였기에 단기 속성 과외가 성행할 수 있었다.

당시 학부모들이 스크랩하는 신문 기사에 드물지 않게 ‘7수 끝에 서울대 법대 합격’과 같은 미담이 출연했던 것도 사실 학력고사 문제의 단순함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90년대에 이르러 세상이 변화했다. 눈부신 경제성장을 거듭하던 대한민국은 이제 선진국의 하청업체를 전전하던 시대를 졸업한다.

피땀 흘려 80년대를 보내면서 다양한 기술력과 노하우가 습득되었고 부는 축적되었다. 여전히 제조업 중심의 국가이지만 이제 자체의 신기술, 신제품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수학능력시험(大學修學能力試驗), 수능의 시대가 열렸다.

# 사고(思考)의 시대, 수학능력시험

필자는 초기 수능 세대이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과목이 학력고사와는 다른 형태의 문제들로 출제되었고 시험의 난이도는 급상승하였다.

사교육의 효과는 크게 반감되기 시작했다.

학력고사에 익숙한 사교육 강사들에게 수학능력시험이나 당시 대학별 고사를 대비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사교육 종사자들은 획일적 문제 유형에 대한 전문가들이지, 학문적 소양이 갖춰진 이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현명한 학생들은 학원을 그만두기 시작했다. 학원에서 배울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입시를 경험한 필자는 운이 좋은 편이었던 듯하다. 정해진 시간 동안 똑같은 방식으로 문제만 풀어대는 학원 수업에서 벗어나자 시간이 확보되었고, 확보된 시간은 교과과목의 내용들을 숙고하고 그 내용을 내재화하는데 쓰였다. 매월 모의고사를 시행하였지만, 시험 마다 문제의 성향이 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시험은 문제 풀이의 숙련도와 단순암기를 벗어나 과목 자체의 이해도에 기반한 문제들로 채워졌다.

공부를 공부답게 하는 학생에게 유리한 시험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공부했던 방식은 필자와 동년배들이 이후 학문을 업(業)으로 하는 연구노동자가 된 이후에도 유효했다. 연구자에게 정답은 그저 새로운 문제를 향해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우칠 수 있었다는 점은 중요한 통찰이던 듯싶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꽤 오랜 기간 현 수능, 대학수학능력시험(大學修學能力試驗)이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 했었다. 물론 21세기에 학문을 전수한다는 뉘앙스를 지닌 수학(修學)이라는 단어가 갖는 전근대성이 다소 걸리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학문의 장(場)’인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자질을 묻는다는 취지를 명문화했기에 수능이라는 명칭을 선호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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