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광주가 늘 미안하고 고맙다"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이 망월동 5·18 구 묘역에서 참배하고 있는 모습 ⓒ김부겸 의원 페이스북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이 망월동 5·18 구 묘역에서 참배하고 있는 모습 ⓒ김부겸 의원 페이스북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광주를 방문한 김부겸 더불어민주당(대구 수성갑) 의원이 1980년대 학생운동 시절을 떠올리며 "살인마가 대통령이 되던 치욕의 시절, 특사로 풀려나 광주를 찾아 저의 비겁함을 자책했다"며 "대속(代贖)의 십자가 광주는 희생당했기에 포용할 수 있고, 소외당했기에 연대하는 법을 익힌 듯하다"고 밝혔다.

김부겸 의원은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17일 밤 자신의 페이스북에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찾아 참배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이 같은 내용의 장문을 남겼다.

서울대 출신인 김 의원은 "1980년 5월 17일은 토요일이었다. 저녁 6시, 기어이 신군부가 마각을 드러냈다. 계엄군이 신촌 이화여대를 덮쳐 학생회장단을 개 패듯 패고 끌고 갔다"며 "한 시간쯤 후 그 소식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밤새 숨 죽이며, 다음 날 약속된 집결 지점인 영등포역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며 "12.12에 이어 그예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울분과 함께 공포심이 몰려 왔다. 40년 전 그 날, 계엄의 밤은 그토록 무서웠다"고 전했다.

이어 "다음 날 18일, 약속된 집결 지점인 영등포역으로 나갔다. 곳곳에 진을 친 전경과 사복경찰들이 보였다"며 "가두시위는 실패했다. 이대로 잡히면 안 되니, 무조건 피해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밝혔다.

김부겸 의원은 "광주 첫 소식은 공부 모임을 하던 향린교회로부터 들었다. 공수부대가 시민을 마구 학살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며 "차마 믿을 수 없는데,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이 잠결에 들려왔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피하는 바람에, 광주가 포위된 채 보복당한다는 죄책감뿐이었다"고 덧붙였다.

김 의원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광주로 갈 수는 없었다. 숨어 지내던 친구 집에서 동지들 몇몇과 함께 등사기로 유인물을 만들었다. '광주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광주를 살려야 합니다'라는 제목이었다"며 "산동네인 금호동과 옥수동 일대에 뿌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러기를 두 달여, 제가 안 잡히자 군인이던 아버님을 합수부가 대구 보안사로 잡아갔다"며 "결국 자수를 해야 했고, 안양교도소에 수감 되었다가,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과 함께 특사로 풀려났다"고 회상했다.

김의원은 "살인마가 대통령이 되는 치욕의 시절, 암울한 나날 끝에 겨울쯤 광주를 찾았다"며 "도청 앞과 금남로, 상무대를 보며 저의 비겁을 수없이 자책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광주는 대속(代贖)의 십자가이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도 광주의 억울한 세월은 오래 계속됐다"며 "그런데 정작 광주는 품이 넓다"고 밝혔다.

아울러 "3월 초부터 대구는 코로나 확진자가 폭증했다. 수용할 병상이 제한적이니, 자가격리 밖에 방법이 없었더"며 "그때 광주가 손을 내밀었다. '빛고을전남대' 등 두 곳의 병원을 비워 병상을 내주셨다"고 전했다. 또 "광주 오월어머니집에서도 주먹밥 도시락을 만들어 대구 동산병원 의료진에게 보내주셨다"고 말했다.

또 "광주는 희생당했기에 포용할 수 있고, 소외당했기에 연대하는 법을 익힌 듯하다"며 "광주는 어머니 같다. 온갖 서러움 당하고도 그 상처 보듬어 안고 사랑만 주는 게 광주"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 의원은 "여러분 덕분이다. 여러분의 희생에 힘입어 오늘 저희가 세계 1등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며 "살아남은 저희가 앞으로 더 좋은 나라 만들겠다. 부디 편히 쉬십시오"라고 밝혔다. 이어 "한열이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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